"닥나무 껍질을 흥에 겨워 던지고 찢고 두드리고, 
굿판의 원색 깃발과도 같은 내 작품은 평생을 한국적 정체성을 찾기 위해 매달려온 작업이다.” 

한지를 물에 적신후 손으로 찢거나 짓이기는 작업은 마치 행위예술 같기도 할 뿐 아니라 
타악 연주 같기도 한 독특한 방법으로 작품이 탄생한다.
"닥나무 껍질을 흥에 겨워 던지고 찢고 두드리고, 굿판의 원색 깃발과도 같은 내 작품은 평생을 한국적 정체성을 찾기 위해 매달려온 작업이다.”
한지를 물에 적신후 손으로 찢거나 짓이기는 작업은 마치 행위미술같기도 할 뿐 아니라 타악 연주같기도한 독특한 방법으로 작품이 탄생된다.
one's hometown 2127 2021 97x130cm
one's hometown 2127 2021 97x130cm

‘한지 추상’의 새로운 길

아주 억센 닥나무 껍질부터 부드러운 한지, 이를 캔버스에 올리는 접착제까지 모두 천연에서 나는 재료를 바탕으로 한다.
언뜻 보면 유화물감을 두텁게 바르고 스크래치를 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닥종이 껍질과 한지를 켜켜이 쌓아서 만든 작품이다.
재료가 층을 이루고 누우면 시간이 화석처럼 쌓이고 오방색 형형색색의 한지가 더해지면서 마치 들숨, 날숨을 쉬면서 그림이 말을 거는 듯하다.
한지를 물감으로 이용하고 빗자루를 붓 삼아 펼치는 콜라주 작품은 함섭 화백이 탄생시킨 ‘한지 추상’의 근본 개념이 되었다.
본연의 색과 모양
그의 작품은 두껍게 전통식으로 만들어진 닥종이를 그 바탕으로한 작품이다. 물에 적신 색한지와 전주 고서점에서 공수해 온 고서의 조각들을 한 점 한 점 올려 붙이고 뜯어 붙이며 솔로 두두리고 파괴시켜 표현된 형과 색의 진수, 닥종이의 독특한 ‘맛’을 마음에 두고 작업한다. 함섭은 재료 본래 모습이나 바탕을 완전히 작품안에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이 과정 속에서,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동과 서, 과거와 현재가 혼합되어 한국 전통의 맛이 배어나는 현대회화를 제작한다.


우리 전통과 얼이 스미고 베인 그의 작품은 알싸한 한약냄새가 난다. 닥나무 껍질과 한지를 화폭에 붙일때 사용한 접착제에 한약재인 천궁과 용뇌를 첨가했기 때문. 그림을 실내에 걸었을 때 보고 즐기고 감상은 물론 좋은 기분까지 느낄수 있도록 한 작가의 배려다.머리를 맑게 해주고 잡벌레를 멀리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그는 "나의 작업방식은 우리나라 전통무용, 북이나 꽹과리 사물놀이와 같은 맥락일수도 있다"며 "내 작업에서 색과 면, 그리고 선들은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고향의 풍요"라고 했다.
그의 작품엔 온 정성이 가득하다. 닥나무 껍질을 삶을 때도 산성도 75%인 양잿물 대신 볏집을 태운 잿물(산성도 35%)을 사용한다. 그래야만 작품 보존이 오랜 세월 가능해진다. 그래서 그는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만든다'고 말한다.

한국적인 것의 진수
작품의 바탕이 되는 한지에 주목해보자. 200년이 지나면 보존이 어려워지는 양지와 달리, 닥나무를 주원료로 만들어진 한지는 천년의 세월이 지나도 그 형태가 온전하다. 또한, 양지는 산성을 띠어 점차 황화 되지만, 중성을 띠는 한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결이 고와진다. 한지는 양지가 담을 수 없는 수많은 시간과 역사를 담는 그릇이 된다. 이처럼 한지의 물성이 우리의 소중한 역사와 얼을 아름답게 담아내고 있다. 작가는 이 그릇 위에서 작업을 시작한다. 우리의 뿌리 위에서 뚝딱뚝딱 새로운 역사를 짓는다.


탁탁탁. 한지를 찢는다. 던진다. 두드린다.
북을 치듯 재료를 두드린다. 그의 손에서 시작된 울림은 그림 안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관람객에게 그대로 전해진다. 보는 이의 정신을 깨우고,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는다. 평면 위에 수많은 능선이 만들어지며 한지는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된다. 그는 한지의 강인하면서도 부드러운 성질을 이용해 새로운 형태로 재탄생시키며 한지의 물성과 가변성을 극대화한다.
그의 몸에는 언제나 구수한 향이 배어있다. 한지가 천년의 세월을 견뎌내었듯, 그만의 노하우로 작품에 향과 보존력을 더한다. 그래서 택시를 탈 때면 기사들이 종종 묻고는 한다. “한의사이십니까?” 그 질문에 작가는 조용히 미소를 짓는다. 그의 직업은 화가. 그리고 그의 주된 작업은 작품 안에 울림과 능선, 은근한 향을 더해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이다. 그림을 살아 숨 쉬게 하고 좋은 기운을 불어넣는 일련의 과정이 어쩌면 의사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해방 이후 새로운 기법과 스타일로 한지화를 세계적으로 주목시킨 작가 함섭. 그의 작업이 계속되는 한 현대미술은 결코 서양화에만 자리를 내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손을 거친 한지는 새로운 현대미술의 재료이자 주제로서 그 명맥을 이어나갈 것이다.

작가와 작품이 마음을 움직였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