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웅 작가는 표피를 그린다. 
그의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당연히 피부이다. 

그는 어느 썩다가 끝내 말라버린 채소나 
주름을 잔뜩 머금은 노파의 무뚝뚝한 표정까지 
피부의 어떤 질감이 극적으로 드러나는 표면을 그린다.
박재웅 작가는 표피를 그린다. 그의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당연히 피부이다. 그는 어느 썩다가 끝내 말라버린 채소나 주름을 잔뜩 머금은 노파의 무뚝뚝한 표정까지 피부의 어떤 질감이 극적으로 드러나는 표면을 그린다.
팬지꽃 I 2022 41x31.8cm
팬지꽃 I 2022 41x31.8cm

피부, 표면, 껍질

이들을 드러내는 피부들은 하나같이 겉을 둘러싼 표피라는 측면에서 유사하게 보인다. 말라가는 채소들의 껍질이든, 고구마줄기이든, 노파의 껍데기든, 무슨 연유에서인지 힘껏 부여잡은 손들의 주름이든 서로 아무 상관없이 버석하게 말라있는 듯 하나 그들은 무척 엄밀하게 닮아있다. 그러나 이 닮음은 단지 껍질이나 피부라는 어떤 분류로 인한 닮음은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수분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자신의 내부를 외부로부터 단단히 지켜내고 있는 찌글거리는 표면이라는 점에서의 닮음이다. 이러한 닮음은 감각에 이해서 육감적으로 생산된 것으로, 공간들에 흐르는 어떤 파장이 고스란히 옮겨지면서 패인 흔적들에 의한 닮음이다. 작가는 그러한 표면을 포착하여 그린다. 그래서 이 표면은 그저 겉을 덮고 있는 선물포장이나 안을 감싸고 있는 봉투가 아닌, 내부와 분리되지 않은 채 외부의 어떤 작용을 감당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늙어가는 피부에 대하여  
박재웅 작가의 소재는 크게 인물과 정물로 나뉜다. 베이컨이 프로이드를 그렸고 세잔이 그의 부인을 그렸듯이 인물화가들은 주로 주변인물들을 그린다. 특정인물이 등장할 경우 그 인물이 되게 하는 것은 그의 이목구비 위치가 정확하게 옮겨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를 그이게 하는 모든 상황들이 화폭에 옮겨짐에 의해서이다. 따라서, 화가가 인물을 그리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그를 그이게 하는 모든 것을 그 인물을 통해서 보이게 하기 위해서이다. 


살아가는 자와 죽어가는 자의 힘껏 움켜진 손아귀의 힘을 고스란히 드러낸 손의 주름들처럼 박재웅의 인물들은 그의 주변인이라는 점에서 지극히 개별적이겠지만, 삶의 지탱점에서 화폭을 통해 드러난 피부라는 점에서 보편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인물을 통해 지어미와 아비를 본다거나, 이내 죽은자의 맨들거리는 피부를 본다.


사물의 표피
정물도 마찬가지이다. 시간의 순차를 거스르지 않고 소멸되는 정물들은 무슨 웅성거림이 들리는 듯 일렁거린다. 
그러나 그가 하나를 하나의 회화로 완성하지 않고 하나를 여럿으로 완성해 가는 과정은 그의 회화가 대상을 재현하는데 그치지 않고 어딘가로 더 나아가려는 의도를 가진 게 아닐까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그 어딘 가는, 회화에서 좀 더 ‘썩어가는’ 순간들이지만, 그 순간이라는 것도 그의 작품 제작단계에서는 늘 ‘지금 여기’와 마찰한다. 사진이 정지된 순간으로서의 ‘지금 여기’라면, 회화는 그려가는 과정이 시간의 연속이므로 실제로는 ‘정지된 순간’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 연속성의 어디에 낱개가 아닌 여럿의 회화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장면의 표면
시간이 흐른다, 행복도 흐른다. 
그 물결에 잘 적응하여 노를 젓는 사공은 그 물이 전부 자신의 놀이터임을 안다. 
그 물결을 쥐려고, 소유하려고 아등바등 애쓰는 게 얼마나 어리석고 허무한 것인가를 안다. 


흐르는 것은 결코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저 같이 어울려 누리고 즐기라고 그것은 흐른다. 나를 내던져 맡기라고 그것은 흐른다. 
흐르는 시간 앞에서는 그저 감사와 만족을 느낄 일이다. 
시간의 층위를 머금은 채로 정지되어 있거나 깊이를 지닌 평면을 그렸다.


작가와 작품이 마음을 움직였나요?